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문단 편집) ==== 말년의 재판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b6e1f5529a9878361cf577cedd3fe2c9.jpg|width=300]]}}} || || {{{#fff,#373a3c '''2012년 7월 5일, 최종 재판을 받는 비델라'''}}} || 비델라는 세 번에 걸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아르헨티나는 1983년에 일반 범죄에 대해, 2009년에 군법에 대해 사형제가 폐지되어 무기징역형이 법정 최고형이 되었다. 비델라는 민간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았기에 그가 재판받을 당시에도 무기 징역형이 최고형이었다.] 먼저 비델라는 1983년에 라울 알폰신 대통령의 민선정부 출범 직후 '[[더러운 전쟁]]'을 통해 인권을 탄압한 혐의로 다른 군사평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고, 1985년에 군사 독재 시절의 범죄행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군대에서 제대당한 후 5년 동안 군대에 있는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미국의 눈치, 군부의 눈치에 의해 1990년 메넴 정부에서 실시한 범법자에 대한 사면으로 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6년 인권단체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가 집권했던 시기에 벌린 유아 유괴에 대한 범죄로 1998년 다시 무기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2003년에 키르치네르 정부가 성립된 후, 비델라는 국가로부터 법적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사관학교에 걸려 있던 초상화도 제거당하게 된다. 2005~2006년에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군사정권 시절의 사면법과 메넴 정부 시절의 사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한편 비델라는 아르헨티나 법률에 의해 70세가 된 이후 외출 등을 통제된 채 본인의 집에서 복역하도록 바뀌었으나,[* 이때 비델라는 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했다고 한다.] 2008년 10월 10일에 다시 주거 복역이 금지되고 다시 감옥으로 옮겨졌다. 2010년 7월 2일에는 쿠데타 후 사망한 31명의 죄수와 관련된 재판이 열렸고, 3일 후 비델라는 "나는 내전 시기의 최고 군사권력자로서의 책임을 인정한다. 부하들이 내 명령을 따랐다."고 자백하며 사실상 자신이 모든 만행의 총책임자임을 어느 정도 인정했으며, 동년 12월 22일에 비델라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마르코 파스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 날의 재판에서 비델라는 "어제의 적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을 세우려 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다른 사건들은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 대부분 드러났지만, 아이들을 양자나 양녀로 입양시킨 것은 2000년대에 와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77년 실종 자녀를 찾아 달라며 시위를 시작한 어머니·할머니 등 14명이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면서 아이들이 강제로 입양된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비델라 정권 시절 희생자 가족들이 모여 만든 ‘5월 광장 어머니회’[* 1995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연대해서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의 면회투쟁을 [[https://m.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302361.html?_fr=gg|시도한 바 있지만]], 행형법상 친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면회가 안 됐다.]의 계속된 집회로 아기 납치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납치된 아이들 500여명 중 100여명이 DNA검사를 통해 진짜 가족을 되찾았지만 아직도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델라는 2012년 6월 26일에 이루어진 재판에서 영아 납치를 부인하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만행을 변명하였다. >아르헨티나 사회는 당시 마르크스혁명을 막기 위한 강경진압이 필요했다. 오늘날 '테러범'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 >정부 전복 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7~8천 명이 죽어야 했다. 희생자들의 시체를 비밀리에 처리한 것은 국내외의 저항 촉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 >'''나는 아이들의 엄마들을 어머니로서 대우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엄마들은 ‘열혈 테러리스트’였다. 그들은 태아를 인간방패로 이용했다.''' > >대안이 없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반정부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는 데 견해를 같이 했다. > >실종자 전체 명단은 없으며 부분적인 명단이 있을지 모르나 부실하다. 엄격히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쿠데타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실수였다. [[http://m.zum.com/news/home/2169336|기사]] 비델라는 이 재판에서 '아이를 훔치는 체계적인 계획'은 없었다며 유아 유괴를 부인했고, "나는 정치범이며 나에 대한 재판은 1970년대에 '군부에 의해 패배한' 사람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려는 '복수 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희극적 행위"라는 말을 남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을 보여주며 사회의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2012년 7월 5일에 이루어진 최종 재판에서 영아 납치 혐의가 인정되어 아르헨티나 법원으로부터 50년형을 선고받게 되었고, 양부모들 역시 납치된 아이를 키운 혐의를 인정받아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비델라의 변호인은 비델라가 고령이라는 이유로 가택 연금 상태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실제로 당시 비델라는 만 86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징역 50년형 판결은 사실상 종신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독재정권 기간 저지른 악행들을 감안하면 할 말이 없긴 하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날 재판에 참관인으로 참석한 유아 유괴의 피해자들과 친족들은 판사가 비델라에 대한 형량을 선고할 때 환호성을 질렀고, 눈물을 흘린 사람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판결 후에 비델라는 "국가 화합에 대한 기여에도 부당한 판결을 받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 형벌을 깨끗한 양심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남긴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위치한 일반 교도소인 마르코 파스 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언론인 세페리노 레아토(Ceferino Reato, 1961~)와의 인터뷰에서 비델라는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실제로는 살해되었으며, 자신이 '모든 사람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 아래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는 고백도 했다. 물론 여기서도 비델라는 자신의 정책 실패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https://www.infobae.com/sociedad/2022/05/17/videla-el-dictador-que-confeso-atrocidades-vivia-congelado-en-el-tiempo-y-murio-sentando-en-el-inodoro/|레아토가 2022년 5월 17일에 쓴 당시 인터뷰 회상]] 거기다가 비델라는 재판 내내 "내가 한 일은 국가 전복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 "폭력의 난교를 끝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이 필요했다."는 입장을 시종일관 유지했고, 최종 재판 이전인 2012년 5월에 비델라는 라 나치오나(La Naciona) 신문에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를 회상할 때에는 고통과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는 취지의 편지를 보낸 일도 있었다. 비델라는 결국 피노체트처럼 최소한의 사죄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